6월 1일. 바티칸미술관.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큐폴라 (2024)

로마

6월 1일. 바티칸미술관.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큐폴라

superans2 2018. 10. 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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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미술관(Musei Vaticani)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도시 국가, 바티칸 내부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관 가운데 한 곳이며, 여러개의 미술관과 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티칸 미술관을 지키는 르네상스시대의 두 거장이 있다.
왼쪽의 미켈란젤로는 망치를 들고 있는 조각가의 모습으로 있고, 그 옆에 라파엘로는 파레트를 들고
미소년의 모습으로 있다.

육중한 문을 지나면 경비가 삼엄한 미술관의 입구로 들어가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의 복제품이 제일 먼저 관광객들의 맞이해준다. 오른쪽은 진품.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 작품 가운데 하나인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피에타 상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조각품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조각가의 작품이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서명을 남기기로
결심한다. 마리아가 두른 어깨띠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피에타 상에 남긴 서명으로 유명해졌지만
이후 자신의 오만을 깨달고 다시는 작품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조토와 제자들. 스테파네시 삼면화.
당시 추기경이었던 스테파네시가조토에게 주문한 그림이라 하여 스테파네스 다면화 혹은 세 개의
큰 면을 가졌다고 해서 스테파네시 삼면화로 불린다.
첫 번째 그림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성 베드로다.
자신이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형을 받을 수 없다며 거꾸로 매달리기를 청했다고 한다.
두 번째 그림은 권좌에 앉은 예수가 천사들을 대동한 모습이다.
세 번째는 사도 바오로가 칼로 참수당하는 장면이다. 조토는 바닥에 떨어진 그의 머리에도 황금빛
후광을 그려 넣어 성스러움을 강조했다. 바오로의 잘린 머리는 땅에 세 번 튀었는데 그 자리마다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잘린 머리 앞에 세 갈레의 물줄기가 보인다.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lippo Lippi)의 성모의 대관식. 수도사의 악동으로 길이 남은 프라 필리포 리피.
성모가 지상에서의 삶을 다한 뒤 천국으로 올라가 예수로부터 승리의 관을 받는 그림이다.
마리아는 기도하는 자세로 몸을 낮추어 아들이자 예수에게 공경의 예를 다하고 있다.
비례, 균형, 조화를 으뜸으로 치던 르네상스 화가의 집념이 잘 드러나 있다.
계단부터 상단 벽감까지 잘 계산된 원근감으로 깊은 공간감까지 느껴진다.

멜로초 다 포를리(Melozzo da Forli)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토4.
바티칸 도서관 벽면에 프레스코화로 제작되었으나, 그림 부분을 분리해 캔버스에 옮겨 붙였다.
교황 식스토4세는 훗날, 미술사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대작을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에게
남기게 한 율리오2세의 삼촌이다.
그림 속 천장과 기둥들은 정확한 원근법으로 인해 깊은 공간감을 가진다. 중앙에 낮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식스토4세에게 예를 다하는 자가 플라티나다. 하지만, 깊은 공간감을 자랑하는 그림이
몹시도 이상하다. 화면 정중앙 그림의 주인공이어야 할 플라티나보다 더 좋은 자리에 서서 식스토4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훗날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른 율리오2세다.

식스토 4, 인노첸시오 8, 알렉산데르 6세는 네포티즘의 교황으로서 특히 유명하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 중에는 성직자로서 올바르지 못한 처신 탓에 생긴 사생아를 네포스(nepos:nephew), 조카라고 부르며, 음으로 양으로 조카를 편애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거나 요직에
기용하곤 하였다.네포티즘(nepotism)이란, 자기 친척에게 관직이나 지위 ·명예 등을 부여하는
친족중용주의(親族重用主義) , 우리말로 흔희 족벌주의로 번역되는 네포티즘은 바로 조카 사랑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식스토4세 교황은 자신의 조카 여섯을 모두 추기경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성모의 대관.
그림을 상하로 나누어 천상에서의 일과, 지상에서의 일을 나타내었다.
상단그림은 성모가 승천한 뒤 예수에게 왕관을 받은 장면으로, 천사들의 축하연주가 한창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성모 마리아와 예수만 압도적인 크기로 강조했다. 하늘에 붕붕 떠있는 아기천사들이 귀엽다.

하단그림은 정중앙에 예수가 부활한 것을 믿지 못해 예수의 허리에 생긴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본 뒤에야 인정한 의심 많은 성 토마스다. 이번에도 잠시 자리를 비운 탓에 성모 마리아가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던 그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체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다. 이에 성모 마리아가 하늘 높은
곳에서 옷에 두르던 허리띠를 그에게 던져 의심을 신심으로 바꾸어주었다. 성 토마스 오른쪽에는 천국의 열쇠를 든 베드로, 왼쪽에는 칼을 든 성 바오로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폴리뇨의 성모.
그림 중앙의 배경이 된 데 콘티의 고양인 폴리뇨 마을이다. 무지개 바로 아래로 벼락으로 보이는
주황빛 빛이 떨어지는데, 한때 폴리뇨 마을에 홍수와 함께 큰 벼락이 떨어졌는데, 데 콘티의 집만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무사했다고 한다.
하단 정중앙에는 빈 서판을 든 아기천사, 왼쪽에는 낙타털옷의 상징인 세례 요한, 그 앞으로는 청빈을
신조로 하는 프란체스코, 오른쪽 손바닥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받았던 상처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 푸른 옷을 입고 서 있는 성 예로니모다. 히브리 성서를 라틴어로 옮긴 학자로,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던 중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준 경험이 있어 숨은그림찾기로 보면 사자가 보인다. 무릎을 꿇은 채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붉은 옷을 입은 데 콘티. 얼굴에 생기가 없어 거의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데 콘티는 그림이 완성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그리스도의변용. 라파엘로 최후 유작이다.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줄리오 데 메디치다. 훗날,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된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죽기 2년 전인 1518년부터 그리기 시작했지만, 다 완성하지 못한 채 1520
자신의 37번째 생일날 요절하고 말았다. 그림의 하단 부분만 그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가 색칠을
함으로써 완성됐다.
그림 상단은 예수가 승천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양 옆에 있는 이는 모세와 엘리야다.
그 아래 야트막한 언덕 위 예수의 수제자 요한, 베드로, 야고보가 두렵고, 눈부신 광채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귀신이 씌어 눈이 돌아간 근육질의 아이와 그 아이를 부축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정중앙에 무릎을 꿇은 여인은 고대 그리스의 여신처럼 창백한 피부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벤젤 피터(Wenzel Peter. 1745-1829)
표범과 얼룩말의 싸움, 사자와 호랑이의 싸움,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동산.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벤젤 피터는 동물 그림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내용을 파악한 뒤, 등장하는 동물들을 조사해 그림에 반영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동물들의 모습을 연구하고 관찰한 뒤 스케치 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맹수들의 외견만 꼼꼼히 관찰한 것이 아니라 습성과 행태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아가면서 결코 경험하지 못할 에덴동산, 피식자와 포식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아름다운 에덴동산.

범접하기 힘든 신과, 위대한 성인들의 그림만 보다가 갑자가 동물 그림이 나와서 쌩뚱맞은 생각이 든다.

색다른 나선형 계단이 아름답다. 미술관 주 출입구.

벨베데레의(Apollo Belvedere) 아폴로.
네로 황제 별장에서 발견됐다. 활을 쏜 직후 날아가는 화살을 응시하는 아폴로의 육체를 아름답게
묘사했다. 그리스 신화의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알려진 아폴로는 근육질의 몸매가 아닌 매끈한
균형감과 고전적인 남성미가 돋보인다. 어깨와 팔에 걸쳐진 망토의 사실적인 주름과 발에 신겨진 샌들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티그리스강의 신 (River-God of Tigris).
티그리스 강을 지키는 물의 신이다. 처음 발견될 당시 머리와 오른쪽 팔 왼쪽 손 등 여러 부분이
없었으나 미켈란젤로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항아리 안을 보면 호랑이, 사자, 혹은 뱀의 얼굴이 있는데 저 짐승은 악귀를 잡아먹고 살기때문에
티그리스 신은 항상 항아리 안에 숨기고 다닌다고 한다.

라오콘(Laocoon).
바티칸 미술관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걸작은 라오콘(Laokoon)이다. 라오콘은 트로이
전쟁 당시 트로이의 왕족이자 저명한 예언자였다.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 그리스 연합군 측의
율리시즈가 제안하여 목마를 만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때 그 계략을 알아차리고 이 목마를
트로이 성 안으로 들여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목마를 향해 창을 던진 사람이 바로 라오콘이었다.
그러나 계략이 들통 나지 않게 하려고 그리스 편에 있던 포세이돈 신이 거대한 뱀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휘감아 죽게 했다.
이 작품은 1506, 로마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 근처 포도밭을 일구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두 마리의 큰 뱀에게 휘감겨 고통에 절규하는 격렬한 동작을 완벽한 형태로 잡아낸 이 조각상은
고미술 수집에 관심이 많았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작품을 접한 미켈란젤로는
고대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했고, 교황은 그 평가를 받아들여 이를 구입함으로써
500년 바티칸 미술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항간에는 돈이 없던 미켈란젤로가 만들어 묻어둔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벨베데레의 토르소(Torso Belvedere)
교황 클레멘스 7세 시대에 팔라초코론나에서 벨베데레의 뜰로 옮겨졌다.
이 조각은 머리와 팔 다리가 잘려나갔다. 사지가 없는 조각을 토르소라고 하는데 예술가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옛날 고대유물을 발굴하면서 잘린 것들이 많고 그것들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주어
토르소라는 장르를 가지게 되었다. 역동적으로 움직인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다.
미켈란젤로는 이 토르소에 심취해서, 피렌체의 메디치 예배당의 줄리아노 석판위의 을 만들게 된다.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그림. 빨간 벨벳천의 탁자가 계속 따라온다.

120m 길이의 화려한 황금빛 천장이 아름다운 지도의 방, 벽면에 옛 로마황제 시대의 지도가 걸려있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파르나소스(Parnassus).
파르나소스는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예언자로 님페 클로오도라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으로 새를 이용한 점을 치는 등 예언자로서 커다란 명성을 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신탁소가 자리한 산에 그의 이름을 붙여 파르나소스 산이라고 불렀다.
아폴론은 가운데 나무들 아래 앉아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고 그의 곁엔 뮤즈와 예술가들이 함께 한다.
에로스는 파르나소스 산꼭대기에 올라 황금 화살로는 아폴론의 심장을 향해 쏘았고, 납 화살은 다프네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두 화살은 모두 과녁을 꿰뚫었다. 그러자 아폴론의 가슴속에는 다프네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 끓어올랐지만, 다프네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관심이 가지 않는 냉정한 마음으로 한사코 거절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아폴론에게 잡힐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아버지인 신에게 요청하여 월계수 나무로 변하게 된다. 아폴론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단념했지만, 월계수를 자신의 성수(聖樹)로 삼고 머리에도 왕관 대신 월계수 가지를 엮은 관을 썼다.
그 후, 월계관은 시인이나 영웅을 칭송하는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협상을 그린 작품이다.아틸라는 5세기경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린 훈족의
왕이다. 그들은 게르만족이 살던 북부 유럽뿐 아니라 로마까지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 시절 교황
레오1세는 서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3세의 명을 받고 직접 아틸라를 찾아가 그를 설득해 제국을 지켜냈다.
아틸라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칼을 빼들고 레오1세를 호위하는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고 한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감옥에서 구출되는 베드로.
헤롯 왕에 의해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사도행전의
126절의 내용이다. 중앙은 감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타나는 장면이다. 오른쪽은 감옥
밖으로 무사히 탈출한 천사와 베드로. 왼쪽은 베드로가 사라진 것을 알고 당황해하는 병사들의 모습
이다. 왼쪽 구석의 달빛이나 병사들의 횃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빛을 온몸에서 뿜어내는
천사. 바사리는 밤의 효과를 그리는 데 다른 어떤 그림보다 진실하다라고 평가했다.
세속적 권력도 교회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린 그림이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성체 논쟁.
성체 논쟁은 라파엘로가 무료 40여점 이상의 습작을 남길 만큼 공을 들인 작품이다.
아테네 학당이 철학과 관련된 것이라면, 성체 논쟁은 신학과 관련한 주제의 그림이다.
성체 논쟁은 미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 기도에 의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금색 물감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이 많았던 율리오2세는 황금빛 가득한 이 그림에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서명의 방 천장화.
네 개의 둥근 원 속 여인들은 철학, 신학, 문학, 법학을 의인화 것.
네 개의 사각 그림은 천지창조,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아담과 이브, 솔로몬의 재판을 담고 있다.

"시의 알레고리" "철학의 알레고리"

"신학의 알레고리""정의의 알레고리"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은 17세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Giovanni Pietro Bellori),
그림속에 고대 철학자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1. 플라톤 - 그리스 철학을 언급할 때 단연코 떠오르는 두인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저서 티마이오스(Timaios)를 끼고, 손라락을 위로 치켜든 채 저 높은 곳,
세상을 초월한 어떤 지점 관념세계를 가르키고 있다.
2. 아리스토텔레스 - 역시 자신의 저서 윤리학(Nicomachean Ethics)을 들고 있다.
그의 손바닥은 플라톤과 달리 지상을 향하고 있다.
3. 아폴론 상 - 음악과 조화의 신.
4. 아테네 상 - 지혜의 신.
5. 알렉산드로 -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토론이 끝나면 패자는 중상모략을 하기 마련이다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
6. 소크라테스 - “반드시 결혼하라.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다.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7. 에피쿠로스 - 원자론과 쾌락주의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행복이라는 것은 평정하고
자율적인 심신의 안정 상태, 즉 쾌락이라 칭하였다.
8. 제논 - 제논의 역설. 가장 유명한 역설 중 하나가 아킬레스와 거북이거북이가 먼저 출발하면,
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9. 피타고라스 - 수학의 자도 가까이하기 싫은 수포자라도 이 말은 알고 있다.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끼고 있는 양변 각 제곱의 합은 빗변의 제곱과 같다.”
10. 헤라클레이토스 -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요 만물의 왕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툼 중에서도 그는
그 속에 숨겨진 조화를 발견하였고, 그것을 `반발조화(反撥調和)`라 하였다. 이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로고스(理法)라 하였으며 그는 그러한 이법의 상징으로서 불[]을 내세웠다.
11. 디오게네스 - 디오게네스가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찾아와 곁에 서서 소원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그곳을 비켜 달라고 하였다는 말은 유명하다.
그보다 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알렉산드로스대왕은 내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세속적인 잣대를 벗어나 유유자적하게
자유롭게, 스스로 말하길 개처럼 살았다해서 견유학파로 불린다.
12. 조로아스터 - 수염을 기르고 손에는 별이 가득한 천구의를 들고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다.
13.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 Euclid) - 대머리의 남자가 컴퍼스로 삼각형을 그리고 있는데,
기원전 3세기경의 그리스 수학자이며, 기하학의 근원을 만든 수학자 유클리드다
14. 프톨레마이우스 - 지구의를 들고 등을 보이는 인물은, AD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 그가 집필한 천문학 서적 알마게스트(Almagest,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의미)는 천동설에 관한 모든 이론이 담겨있다.
15. 라파엘로 - 하얀 모자를 쓴 소노마 뒤에서 관객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다.
16. 마르게리타 - 빵집 딸로 피자 메뉴중에 하나인 마르게리타, 라파엘로의 연인이다. 마르게리타
시선도 관객 쪽을 향하고 있는데, 거울을 통해 라파엘로와 눈맞춤을 하고 있다.
17. 파르메니데스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만물의 원인이 존재라고 주장했다.
18. 아낙사고라 - 태양은 인간들을 돌보았던 신적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천체라며 종교적 교리를
벗어나 진실을 알고자 했던 아낙사고라. 신의 존재를 부정하다 사형을 당할뻔한 그리스 철학자.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볼세나의 미사.
1263년에 일어난 기적을 다루고 있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보르고 화재.
레오4세가 재위하던 847년 성 베드로 성당과, 산탄젤로성 사이에 있는 보르고 지역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왼쪽의 벌거벗은 남자는 막 담을 넘어 화마로부터 벗어나고 있고, 노인을 업고 나오는
청년의 모습도 과장된 근육질이다.
한 여인은 아이를 넘기고 있다. 아이들의 행방을 몰라 걱정하는 엄마들의 모습이 고통을 드러낸다. 물 항아리를 들고 분주히 불을 끄고, 멀리 배경 건물 아래로 레오4
모습도 보인다.

라파엘로 산치오와 제자들의, 오스티아 전투.
레오4세가 재위하던 849년 사라센 해적이 교황령인 오스티아 해안을 거쳐, 로마로 이어지는 티베르
강의 하구까지 진격해오자 이를 저지하면서 벌어진 전투장면이다. 로마는 나폴리 왕국의 도움을 받아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결국 호시탐탐 기독교 사회를 넘보던 투르크인들에 대한
레오4세의 징벌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전체 모습이다. "천지 창조"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의 제단화가 있다.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제작 기간은 1508년부터 1512년이다.
프레스코는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으로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이다.
면에 회반죽을 바른 뒤에 그것이 마르기전에 안료를 입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빨리 그림을
그려야하고 수정이 필요한 경우 그 부분을 죄다 뜯어내야 한다.
따라서 가능한 한 빨리 정확하게 그려야하는 굉장한 기술이 필요하다.
창세기 장면들을 그려 넣었다.
1.만취한 노아 2.홍수 3.노아의 제사 4.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추방 5.이브의 창조 6.아담의 창조
7.땅과 물의 가르심 8.식물과 해와 달의 창조 9.빛과 어둠을 가르심. 10.히브리의 예언자 요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시스티나 성당 제단화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콘클라베가 열리는 곳이다.
천장을 덮은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실로 어마무시한 작품들이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진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의 최고작으로 간주되는 그림이다.
1533년 미켈란젤로는 교황 클레멘스7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단 제단 벽화를 그리하는 명령을 받는다.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였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로마약탈(1527)과 유린에서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후에 이루어질 두려운 심판의 날을 각인시켜 카톨릭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택한 주제였다. 그림을 주문한 클레멘스7세는 이듬해 사망하고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바오로 3세가 다시 이 작업을 의뢰함으로써 1535416일 발판의 조립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541년 가을, 면적 167.14m2의 벽면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모습을 한 총 391명의
인물상이 드러난다.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of St. Peter).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349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베드로 성인의 묘지 위에 세워졌고 실베스트로 교황이 396년에 대성전으로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이민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그때마다 보수작업이 뒤따르긴 했으나 원래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침내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성전의 재건축 계획을 세우도록 하여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 사업이 시작되었다.
권력을 내뿜는 건축물이 있다. 가톨릭의 총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교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톨릭 교회 그 자체도 아니다.
가톨릭의 진원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 국가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은 우아하고 강렬한
인상을 준다. 미켈란젤로는 156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건물에 매달렸으며, 그 뒤 1593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마침내 완공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실내전경.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와 발다키노(baldacchino).천개(天蓋)

원형인 광장으로부터 길쭉한 모양으로 뻗어 있어, 위에서 보면 마치 열쇠와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천국의 열쇠'라고도 불리고는 베드로의 상징.

성 베드로 대성당 큐폴라에서 본 전경.

베드로의 상징 두개의 열쇠.

바티칸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 "신뢰"를 중시하는 바티칸 스위스 근위대의 역사는 15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바티칸 교황청까지 쳐들어왔을 때 스위스 용병들은 결사항전을 벌였다. 전체 187명 중 147명이 숨지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교황 클레멘스7세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데 성공한다. 교황청은 이때부터 바티칸 수비를 스위스 용병에게만 맡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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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바티칸미술관.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큐폴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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